부조리극은 계속되어야 한다.
Absurdes Theater Must Go On


이정헌 독립기획자
Jeong-heon Lee, Independent Curator

이희경은 주로 인체와 그 부속을 만든다. 대학원 재학 중에 본격적으로 시작한 작업이니, 큰 주제에 대한 서사와 조형문법은 여전히 수정/교열 중이다. 흙을 인체 크기로 소조하여 가마에서 소성해 작품을 제작하기 때문에 다작이 용이하지 않다. 때문에 아직까지 작품 활동의 ‘계보’랄 것이 없지만, 작가는 새 작품을 제작할 때마다 다른 조형문법을 사용하거나 이전에 시도한 방식을 재시도하면서 극적이고 풍성한 효과를 연출한다. 짧은 시간 여러 조형문법을 실험했지만, 작품의 전체 문법을 관통하는 게 바로 괴기미(怪奇美)이다. 비인간화나 죽음 등의 폭력에 같은 폭력으로 맞서 현실을 숨기지 않는 태도가 강하게 드러나니 말이다. 현실을 작품으로 상쇄하는 일에 작가는 여념이 없다. 우선 과정을 살펴 보자.
2011년, 이희경은 코뿔소 거죽을 덮어 쓴 인간을 묘사한 <~같아, no.1>, <~같아, no.2>, <~같아, no.3>와 사지가 뒤엉킨 채 뿔을 단 ‘괴물’ <Head and Ears>을 제작한다. 극작가 외젠 이오네스코(Eugene Ionesco)의 작품 <코뿔소>에서 영감을 받은 듯 보이는 이 작품은, 청동이 산화된 듯 푸르고 어두운 색조를 띄는 두터운 가죽과 힘없이 눌러 앉은 인간의 모습을 형상한다. 도기가 주는 질감에 인물의 힘겨운 자세가 더해져 작품은 한층 무거워 보이는데, 마치 작가가 겪은 모순과 부조리한 상황이 뒤엉켜 상념 덩어리로 보인다. 이 ‘괴작’의 조형문법과 괴기함, 독특한 심미성이 이후 제작되는 작품들에 모델이 되어 여러 캐릭터를 만든다. 그 캐릭터들은 저마다 비인간성, 폭력성, 죽음 등의 주제어를 양껏 품고 있다.
작품 제작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2012년, 이희경은 <변이인>, <수각황망>, <변이공간> 등을 제작했다. 이전 해에 비해 스케일이 커졌고, 이와 함께 괴기/기괴한 묘사 또한 한 발 더 나아갔으며, 이후 <불가지>, <애완인>(2013), <쳤으면 치워라도 주던가>(2014) 등의 작품도 같은 양상으로 진행됐다. 이 가운데 <변이공간>은 세 인물상은 머리 부분에서 형형색색의 체액을 내뿜는 가운데 제 가죽을 벗겨 내장을 보여주는 모습을 하고 있다. 이 작품으로부터 이희경은 아브젝시옹(abjection) 개념이 엿보이는 연작을 2014년까지 이어갔다. 보편의 미의식을 반박하며 불편함(uncanny)를 주는 동시에 카타르시스를 전해 주는 이 개념은, 안에 숨겨졌던 것이 바깥으로 드러나는 현상을 통해 존재가 진면모를 내보인다는 의미도 가지고 있다. 작품은 이에 충분히 화답하고 있다. 나는 아브젝시옹에 더해 작가가 그노시스적(gnotisque) 시선으로 작품을 만들었다고 생각한다. 이희경은 인간의 죽음과 비인간성을 주제로, 인간의 육체를 잔혹하게 변형시키거나 과도한 폭력을 가해 기괴한 캐릭터를 만들었다. 그들은 죽어가고 있으며, 인간이지만 인간성이 없다. 그노시스교(gnosticism)에서 인간의 육체는 ‘껍질’에 불과하다고 상정되며, 사회에 의해  ─  달리 말하자면, 세속적 인간들에게  ─  더럽혀졌기에 정화되어야 하는 대상으로 치부된다. 극도의 영육 이원론이다. 작가 본인을 비롯해 타자가 지닌 비인간성을 표현한 그간 작업에서, 몸 자체는 단지 탈옥해야 할 감옥으로 묘사된 것일 수도 있다. 포스트모더니즘과 프라그마티즘을 지나 최근 포스트-휴먼 담론까지, 몸은 인간에게 중요한 주제다. 아브젝시옹은 현대(2차대전 이후), 그노시스는 기원전부터 지금껏 계속된 담론이다. 전근대의 담론이 현재 유효하지 않다는 지적에 개인적으로 반대한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와 같이 인류가 풀 수 없는 담론에 수명이란 있을 수 없다. 단지 시대상을 반영하며 질문을 좀 더 정교히 다듬어질 뿐이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있던 극악한 폭력과 부조리함, 비인간성의 정점에서 피해자들이 겪었던 건 실은 육체의 몰락, 그노시스적 경험(고통)이었다는 지적도 있듯이 말이다. 예술가는 과학자가 아니다. 그들은 폐기된 이론도 현재로 소환할 수 있다.
2014년작인 <각>에서는 예의 괴물이 등장하지만, 아브젝트에서는 손을 뗀다. 대신 이후 작품에 몇 차례 등장하는 유성/수성 안료 흘려내리기 기법을 선보인다. “체액과 세포 느낌을 주기 위함”이라고 작가는 설명하는데, 이는 이전 작품에서는 직접 소조했던 부분이다. <어느 날>(2014)는 두 방식이 같이 사용됐고, 2015년작 <몸과 마음>에 문신 이미지와 함께 나타났고, 이후 최근작인 <그녀에게>(2016)로 이어진다.
작가는 작품에 등장하는 문신이 “살아가며 새겨지고 기록되는 다층적 감정”을 의미한다고 했다. 아마도 이희경에게 문신이란, 스티그마(stigma)의 현상  ─  기독교 성인의 몸에 원인 없이 나타나는 성흔  ─  과 같은 원리일 테다. 분명히 바깥으로 어떤 이미지(상처)가 나타났지만, 그 원인을 알 수 없는 몰이해를 말하는 게 아닐까? <각>을 보면, 어느새 새겨지고 이유없이 기록된, 그래서 부조리한 “다층적 감정”이 주체, 즉 문신을 새긴 인간에 앞서는 듯 보인다. 인물은 큰 동작으로 옷을 벗어 얼굴을 가리며 단지 문신이 가득한 복부만 보여준다. 이전엔 살갗을 뜯어 내장을 보여주더니…. 자정 작용이 일어난 것 같지는 않고, 아브젝시옹이나 그노시스교의 개념  ─  스스로 타자화시켜 비인간적으로 되기  ─  을 보다 은유적으로 내보인 듯 하다.
문신은 사적인 서사를 공적으로 기념한다. 문신은 저마다 고유한 서사를 가지고 있지만, 그것은 몸의 ‘보여지는 기능(사회적 기능)’을 통해 타인에게 전달된다. 허나 그 의미가 드러나진 않는다. 따라서 어떤 부류의 문신  ─  가령 러시아 마피아의 문신  ─  은 마치 성화(icon)와 같아서 텍스트와 이미지가 일대일로 대응하되 기호와 기표 사이가 통용되는 사회가 아니라면 해석이 안된다. 이희경이 작품에 그려 넣는 문신의 역할은 정확히 이와 반대다. 문신의 주인, 즉 사적인 서사를 기록한 주체가 알 수 없는 서사로 가득하다. 따라서 불쾌함과 수치심은 문신을 보는 이가 아니라 온전히 문신을 한 이의 몫이 된다. 부조리하고 아이러니한 상황이다. 수치심을 말하는 shame의 어원은 인도유럽어 skam, skem에서 왔는데, ‘숨기다’와 ‘피부’라는 뜻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비인간적 면모를 감출 수 없다는 이야기를 보다 가시적으로, 극적으로 만들기 위해 이희경은 문신이란 문법을 가져왔다.
도기 위에 그린 문신 도안은 대체로 반인반수들이 칼을 들고 위협적인 자세를 취하거나 내장기관이 터져나온 상황이다. 이 캐릭터와 이들이 만드는 풍경은 마치 중세시대 성화  ─  영육을 철저히 분리시킨 사회에서 자행된 폭력  ─  , 히에로니무스 보쉬(Hieronymus Bosch) ─  불평등한 세상에 공평한 종말을 바라는 ‘골방 염세주의’  ─  의 작품, 일본 세미-고어(semi-gore) 만화  ─  불투명한 사회현상에서 자행되는 극렬한 타자화  ─  에서 튀어나온 것 같다. 한마디로 괴기(怪奇, 혹은 기괴, grotesque)하다. 이 개념, 즉 괴기미는 자칭 이성의 빛을 받았다고 ‘착각’한 근대가 전근대기를 괄시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합리와 비합리, 정상과 비정상, 미와 추, 과학적 사고와 ‘야만적 사고’의 차이를 더욱 확연하게 만든다. 괴기미의 특이점은, 이 이분법 사고 속에 모호함 또한 도드라져 결국 냉소만 남는다는 것이다.
문신이란 조형문법이 도입된 이후, 작품의 모든 인상을 압도해 버린다. <각>과 <몸과 마음>에선 인물이 얼굴을 가리고 있거나 윗옷을 벗는 동작만 취하고 있을 뿐, 이전 작품에 비해 시각적 충격을 주는 요소나 극단적인 흘려내리기 기법도 없다. 즉 별다른 ‘상황’이 작품 안에 부여되지 않았다. 허나 최근작 <그녀에게(Talk to her)>(2016)에서는, 문신과 함께 마치 연극의 한 장면이 연출됐다. 2013년작 <음?>에서 잠시 등장했던 이 방식은 캐릭터가 처한 상황을 보여주는 게 아니라 사건의 서사, 인과관계를 연출한다. 자전거 안장 머리를 한 여성을 바라보는 척추만 남은 투명인간이 책상에 구부정하게 앉아 있다. 척추 모형은 2013년작 <불가지>에 부속으로 등장했다가 2014년작 <남겨지 것들>에서 독립된 작품이 되었는데, 최근(2016년) 하나의 캐릭터로, 즉 어떤 지위와 역할을 부여 받은 모양새다. 이는 <그녀에게>에 사용된 문신 또한 마찬가지이다. 여기에 가발이나 자전거 안장, 책, 극장을 떠올리게 하는 커튼 등의 ‘소품’이 쓰였으니 이는 하나의 극이라 봐도 무방하다. 외젠 이오네스코의 극을 즐긴다는 이희경은, 여태 저만의 캐릭터를 만들어 오다가 본격적으로 부조리극 만들기에 들어간 것처럼 보인다. 부조리함 자체가 마치 공기처럼 쉽게 다가오는 상황에 대해 말한다. 본인의 작품보다 괴기스런 군상과 파국적 사건이 자신과 관계 맺는 사이에 어떤 몰이해가 낀 것인지 인지조차 할 수 없음에 격하게 탄식한다.
요컨대, 일련의 작품 제작 과정, 진화에 속도가 붙었다고 볼 수 있다. 지금까지는, 작가라면 누구나 진행하는 조형문법 다듬기 과정이 흔들림 없이 이어진 모양새다. 괴기미에 기반한 캐릭터가 축적되었고, 이들이 한 데 모이기 시작했다. 사용했던 방법을 불연듯 중단했다가 다시 사용하는 게 지금까지 나타난 이희경의 작품의 특징이다. 물론 2013년작 <작용되어지는 것에 대한 작은 시도>와 같이 어떤 곳에서 속하지 않는 설치작품도 있지만, 내가 예상하기로 이또한 조만간 등장하지 않을까 싶다. 또한 이제껏 구사한 조형문법 가운데 하나를 저만의 고유한 기호처럼 만드는 시도도 조만간 일어날 것 같다. 일종의 메뉴얼 작업이랄까. 가령 유성 안료를 흘리는 기법이나 척추 골격 작업 자체를 하나의 ‘언어(기표)’로 만드는 일 따위 말이다. 그에 대한 해석은, 마치 문신처럼 사적 영역이 아닌 공적 영역으로 넘겨지는 것이다. 작가는 향후 소조와 소성이란 방식에서 벗어나기로 했다. 이에 따라 조형문법의 진화는 새로운 전기를 맞이할 것으로 예상된다. 형식과 크기는 바뀔지라도, 연출 동기에서 비롯된 캐릭터들의 ‘몸 바친 열연’은 계속될 것이다. 그리고 계보가 성기게 모여 극을 이룰 것이다. 참혹한 현실을 상쇄하는 부조리극 말이다. 부조리극은 계속되어야 한다.

2016. 이정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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